2019년 블록체인‧암호화폐 업계는 ‘탈블’과 ‘존버’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 해였다. 탈블은 블록체인 업계를 이탈한 사람을 말하고, 존버는 끝까지 버티는 사람을 이르는 속어다.

산업을 주도하는 인재들의 특징을 ‘떠나거나 버티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그만큼 산업이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난 2017~2018년 각종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수십~수백억 규모 토큰 투자가 몰렸던 암호화폐공개(ICO) 열풍이 사라진 가운데 암호화폐 시세 하락에 정부의 제도 미비로 사업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탓이다.

ICO 대신 기존 창업 생태계와 같은 시리즈A 등 단계별 투자를 받은 블록체인·암호화폐 업체들도 자금난 속에 시장 침체기를 버텨내고 있다. 블록체인·암호화폐 업계에 탈블과 존버들의 이야기를 익명으로 정리해본다.

탈블들 “미련 남아 연구-투자는 지속”
26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어제의 존버가 오늘의 탈블이 되거나, 블록체인 업계에 한쪽 다리만 걸친 채 한쪽으로는 다른 먹거리로 명맥을 이어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다만 블록포스트가 만난 탈블은 존버와 마찬가지로 블록체인·암호화폐 기술과 철학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다.

벤처캐피털(VC) 출신 A씨는 대기업의 블록체인·토큰경제 관련 컨설팅을 사업을 했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 자문이 솔루션 도입 등 돈이 되는 사업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A씨는 “창업초기부터 토큰 투자는 받지 않았고 엔젤 투자자와 각종 담보 대출로 버티고 있다”며 “공동 창업자들과 클라우드 관련 사업을 구상해 투자유치를 모색하는 등 다른 수익모델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사업방향을 버꾸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A씨는 “그렇지만 한쪽으로는 여전히 스테이블코인(가치안정화폐) 등 블록체인·암호화폐 연구를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B씨는 비트코인이 가장 우수하다고 믿는 ‘비트코인 맥시멀리스트’이지만 다른 업종으로 이직했다. B씨는 탈블의 이유로 ‘현타(현실자각타임·현실 직시를 뜻하는 신조어)’를 꼽았다. B씨는 “비트코인 장외거래(OTC) 등 국내에서는 그 어떤 크립토 관련 서비스를 할 수 없다는 현실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는 분위기가 힘들어 이직을 결정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B씨는 “탈블 이후에도 비트코인에 적립식 투자를 하고 관련 보고서와 국내외 시장동향을 살피고 있다”고 남은 미련을 고백했다.

삼성전자와 블록체인·암호화폐 기술 협업까지 했던 C씨는 다른 서비스 분야에서 새로 창업을 했다. C씨는 “암호화폐 결제를 위해 전국 가맹점을 모으고 대기업 협업까지 이끌어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며 “블록체인 업계 종사자들이 꿈꾸는 이상향과 달리 실제 소비자들은 기존 간편결제에서 이더리움 등 암호화폐 결제로 넘어올 요인이 아직 두드러지지 않아 대중화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존버 “시장 조정기 버텨낼 것”
‘가치의 인터넷’이라 불리는 블록체인·암호화폐 기술 기반 서비스 개발을 향한 도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버들은 현재 블록체인·암호화폐 시장 침체기를 시장 조정기로 분류하며, 옥석이 가려지는 중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시장 상황이 버텨내기 녹록친 않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유행처럼 맛봤거나, 암호화폐 시장에서 투기를 조장했던 사기 프로젝트들이 사라지는 시기를 넘기면 대중적 시장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유지하는 것이다.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체와 기술 협업을 이어가고 있는 D씨는 “인공지능(AI) 발전 과정과 비교해보면 블록체인 역시 실제 산업에 접목되는 과정에서 개발자의 이상과 현실 간의 격차는 좁혀질 것”이라며 “게다가 AI 초창기에는 컴퓨팅 파워나 개발인력이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기 때문에 수 십 년 동안 발전과 침체를 거듭했지만, 블록체인은 산업에 융합되고 수익으로 이어지는 시기가 상대적으로 빨라 향후 5~10년 이내 대중화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재벌 계열 시스템통합(SI) 업체와 카드사를 거쳐 은행권에서 블록체인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E씨도 “암호화폐 투기 광풍으로 인한 정부의 강력 규제 때문에 지난 2년 동안 자체 블록체인 플랫폼 개발이나 토큰 관련 서비스는 언급조차 못했지만 최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며 “이미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블록체인·암호화폐 기반 디지털 금융 시장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에 일부 메인넷이나 하이퍼레저 기반으로 당장 소비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파트너사들과 미팅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기술이 대중화되지 않아 시장이 열리지 않는 것은 사업가들에게는 분명 악재다. 기술은 한발 앞서갈 수 있지만 시장은 너무 빠른 몸짓에 응답하지 않는 법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밑천으로 사업을 벌이는 창업가들이 잠재적 범법자로 지목되는 제도적 허점은 정부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영역이다. 2020년을 정리하는 시점에는 제도의 허점이 창업의지를 꺾었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기를 기대한다.

/블록포스트 김미희 기자